야고보서 2장 14-26절 | 행함 없는 죽은 믿음 (야고보서 2:14-2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190425 최근 답변 27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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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 없는 죽은 믿음 (야고보서 2:14-26)
아침예배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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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4절-26절 행함이 없는 믿음, 복있는 사람들 오늘 …

행함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따라오고 행함으로 믿음이 더욱 굳건해집니다(22).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들 이삭을 바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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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행함 (약 2:14-26) – 유평교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이것은 우리의 영혼과 몸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있으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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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4-26절/믿음과 행함 – Daum 블로그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행함도 있어야 합니다. …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보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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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야고보서 2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 …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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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14-26 행함이 있는 믿음 – 네이버 블로그

1.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받은 구원을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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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삽시다 (약2:14-26)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c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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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 – 야고보서 2:14-26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어떤 자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한다면 둘 다 반쪽 신앙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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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14-26 KRV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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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4-26절 행함, 하나님께 드려지는 흠 없는 산 제물

2:14-26은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해 다룹니다. 믿음은 지적인 이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거짓된 것입니다. 믿음은 삶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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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4-19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장 14-19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야고보는 거짓 믿음과 참된 믿음을 구별하기 원합니다. 무조건 믿는다고 고백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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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4절-26절 행함이 없는 믿음, 복있는 사람들 오늘의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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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믿음의 근거일 수는 없지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오늘의큐티하며 말씀을 묵상합니다.

■ 복 있는 사람들, 오늘의 큐티

일년일독 본문 : 아모스 7장-9장, 오바댜 1장

찬송 : 새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1.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2.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 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3.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강건케 하여 주옵소서

4.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행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아멘

성경 : 야고보서 2장 14절-26절, 개역개정성경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제목 : 어떤 것이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까?

본문에 대한 질문

어떤 것이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까?(15-17) 행함이 없는 믿음의 결과는 어떠합니까?(17, 26)

구절에 대한 해설

하나님은 한 분…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 : 누구보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잘 알고 심지어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모습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기생 라합(25} : 라합은 믿음의 인물로 등장하지만 그녀가 기생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즉, 비록 기생의 삶을 살았지만 믿음의 행동으로 다시금 믿음의 사람이라 불린다.

■ 본문 큐티하기

행함이 없는 믿음(14-20)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도무지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요. 가령 곁에 있는 형제가 당장 먹을 것이 없는데 도울 생각도, 그렇다고 안타까워도 하지 않고 예의상 몇 마디 던지고는 그냥 지나친다면 그의 믿음을 의심해 봐야하지 않을까요?(15-16) 야고보서는 이것에 대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 말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믿음의 형제도 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겠는가 묻는 것이지요. 사실,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도, 그렇다고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알지만 믿지 않는 겁니다. 이처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내 삶을 바꾸어 놓을 정도의 것입니까? 믿음의 고백은 있되, 믿음의 삶(행함)이 없지는 않나요? 나에게 부족한 부분은 혹 없을까요?

행함과 믿음(21-26)

행함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따라오고 행함으로 믿음이 더욱 굳건해집니다(22).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행동으로 순종합니다. 생각만 하지 않습니다.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22절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라합도 그렇지 않습니까? 담대하게 사자들을 접대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25). 기생으로서 별로 의로울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믿음의 한 행동이 백 마디 고백보다 귀하게 느껴집니다. 주님을 믿노라 고백하는 사람은 많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성도는 적은 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백 마디 고백보다, 믿음의 한 행동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많지만 행하는 사람이 적은 시대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믿음의 작은 행함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함입니다!

오늘의 기도

말로만 고백하지 말고 행함으로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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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행함 (약 2:14-26)

제목 : 믿음-행함

본문 : 야고보서 2장 14절-26절

설교자 : 최종혁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는 전체적으로 ‘우리의 믿음이 어떤 증거로 드러나느냐’, ‘참된 믿음이 무엇으로 입증되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시고 혼란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 말은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입니다. 믿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고, 이후의 삶은 어떻게 살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맞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에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오랫동안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루고자 해왔으므로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나 복음이 전파될 때도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행위로 의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이것에 대해 두 가지로 오해를 했습니다. 첫째는 어떻게 믿음만으로 의를 이룰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율법에 눌렸던 유대인이 복음을 듣고 자유를 얻어 기쁜 나머지 ‘이제는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구원과 상관이 없으니 맘대로 행하며 살아도 된다고 방종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야고보가 바로잡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와 야고보서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개혁자 루터도 야고보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지만 그것을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야고보서가 마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 같아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야고보도 믿음과 행위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각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은 것입니다.

14-17절을 보면 야고보는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이 과연 있을까요? 이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입술로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단지 한 순간의 고백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14절). 그는 입술의 고백만 있을 뿐 행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로서 드러내야 할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고 말할 때 행위는 구원받기 위한 행위, 즉 율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구원받은 이후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믿음 이후에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험 가운데 인내하는 것, 믿은 자의 정결한 삶,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 차별 없이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 긍휼을 베푸는 삶입니다. 믿는 자로서 이것이 삶의 증거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야고보는 입술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증거가 없는데 있다고 말한다면 그 믿음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이것은 구원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이 그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죽은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에 이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15,16절).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자가, 가난한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일반적인 인사이나 특별히 구걸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 그들을 돌려보냈을 때 쓰던 말입니다. 축복이라기보다는 이 자리에서 나가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려 있는 형제, 자매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을 조롱하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믿음의 고백만 있고 행함이 없다면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고백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겉이 일하지 않는 것은, 속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왜 죽은 믿음일까요? 행함과 믿음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이것은 우리의 영혼과 몸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있으려면 영혼과 몸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 둘이 분리되면 죽은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도 그런 관계입니다. 행위를 떨어트려 놓고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켜 놓고 ‘행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이 함께 있는 것인데 ‘왜 분리시키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에는 행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 행동하지는 않을꺼야’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믿음은 거짓입니다. 후에 그 사람이 어떤 요청을 했을 때 그것에 따르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을 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들에 ‘하지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18절).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실체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함과 믿음이 함께 있을 때 그의 행함을 통해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습니다(막5:7, 행16:17; 19:15).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귀신들도 알고 심지어 ‘떠는’ 행위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귀신들의 문제는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이 믿음의 고백만 있는 너희는 도대체 무엇으로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믿음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절)라고 하면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1절).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육신의 조상이자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가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칭의)이고, 또 하나는 어떠한 사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칭의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4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입증된다, 증명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야고보서 말씀으로 돌아와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칭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입증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것은 창세기 22장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신 것은 창세기 15장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15장에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비로소 그의 의로움이 입증된 것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절).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게 하는데 있어서 부족했기 때문에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행함으로 믿음이 그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넘어지고 잘못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고 나서 조금씩 변화를 보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제물로 마침으로 그의 믿음이 참 믿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회개와 순종의 열매들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내가 주인으로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나서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순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들이 우리가 가진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가 완벽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완벽해서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방향이 다르고 그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걷는 것으로 자주 표현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을 향해,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비슷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 다릅니다. 그는 사단의 속임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해 갑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3절).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위를 수반하고, 행위는 그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드러냅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4절). 행함으로 믿음이 입증되고 고백하는 것으로만 입증되지 않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고백한다고 그의 믿음이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다면 이제는 다른 예로 라합이라는 이방인을 듭니다. 라합이 언제 칭의를 얻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는 사자들 앞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고 고백합니다. 그녀의 믿음의 고백이 입증된 것은 정탐꾼들을 다른 곳으로 나가게 할 때였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31).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죽음은 분리입니다.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행함 없는 믿음’도 역시 죽은 믿음입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죽은 믿음이 무서운 것은, 본인은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영생을 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멸망으로 가고 있는데도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나만 멸망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멸망시킵니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별것 아니네’라고 판단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귀하심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로막는 것, 다른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시험하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행함의 방향성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긴 기간을 두고 보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의 동기를 잘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니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행동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구원받는 믿음이 있는가’, ‘그런 삶이 드러나는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참된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나길 바랍니다.

영적 분별력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얼른 보면 이 둘은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우리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합니다. 행함은 관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21절에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24절에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절에 기생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맞습니까? 그러면 야고보서는 틀립니까? 아닙니다. 둘 다 맞습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이 중요합니다. 언뜻 보면 내용이 서로 대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함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행함이 아닙니다. 구원의 결과로서의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무시하고 행위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전제로 그렇게 믿음으로 구원 얻는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 구원은 취소되는 법도 없고, 중간에 잃어버리는 법도 없습니다. 이렇게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다시 타락하여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행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구원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배우고 믿다 보니 일부에서 부작용이 생겨났습니다. 행위에 대한 무용론입니다. ‘적당히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비책으로 야고보서를 주셨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행함도 있어야 합니다.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

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계속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음을 증거하는 행실이 없다면 그런 거짓된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행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2:8-9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믿음이 행함을 통해서 입증되는 법입니다. 믿음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나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행동이 내가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겨우내 죽은 것 같은 나무에 봄이 되면 새싹이 나고 꽃이 핍니다. 이것을 통해 그 나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나무에서는 싹도 나지 않고 꽃도 피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행함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기 때문에 행함이 없습니다. 행함으로 증명되지 않는 믿음이라면 믿음 자체가 없는 것이고 그런 믿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독약이 든 음식이라는 것을 안다면 절대 먹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참으로 믿으면 지키게 되고, 말씀을 어기면 죽는다고 믿으면 절대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15-16절에 보면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데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서 필요한 것을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배고픈 사람을 볼 때 말이 아닌 행동으로 도와주고 그 사람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추위에 헐벗고 떠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따뜻하게 입혀줄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이 믿음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이 나오는 법입니다. 요한일서 3:17-18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임

18절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없어 보이지만 삶의 현장에 나가서 행동을 통해 선을 베풀고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삶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없으나 교회 안에서는 누구보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일까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가 없고, 속에 있는 믿음을 행함으로만 나타내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에 참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으며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믿고 떱니다. 여기 귀신들도 믿는다는 말은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5:7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도 않고, 죄를 회개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기에 헛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분인 줄 아는 것은 귀신들도 압니다. 지식에 있어서는 귀신들이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뿐이지 믿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행함이 없다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닙니다. 성경을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믿음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행동함으로 삶의 열매를 통해 입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설교를 듣습니다. 너무나 많이 듣기 때문에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다 기억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 설교 말씀이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예배당 안에서의 신앙으로 그치고 삶의 현장에서는 무기력하다면 그 믿음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속을 살펴보아야 하고 맛을 봐야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역시 그 속을 보여주는 행함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20절). 생명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호흡하고 활동하는 것처럼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이 나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속에 알맹이가 없고 껍데기 뿐이므로 헛것이요 그 헛것을 자랑하는 자는 허탄한 사람입니다.

3.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됨

21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을 꼽고 있습니다. 창세기 15:5-6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이때는 이삭이 태어나기 전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에 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로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행함을 통해서 믿음을 입증하고 드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은 행함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말씀이 없이 믿는다는 것은 미신이요 맹신입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또 몸으로 순종하여야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여호수아 3장에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요단강을 갈랐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으로 들어가면 요단강이 멈추고 마른 땅으로 건널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흐르는 강물속으로 어떻게 들어갑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하나님께서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여섯째 되는 날에는 이틀분을 주시고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려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갔다가 거두지 못하고 그냥 왔습니다. 23-24절에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온전한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벗이라고 칭하셨습니다. 믿음과 행함을 통해서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깊이 교제를 나누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25절에 여리고 성에 살던 기생 라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 함께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지만 그는 행함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고 멸망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그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것을 믿었습니다.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었고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를 가르신 일과 대적들을 멸하신 일을 듣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여리고를 정탐하던 사자들을 숨겨주는 행동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기생 라합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행위가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될 때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삶 속에서 내 믿음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17절 20절 26절 세 번이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봅니다. 행함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믿음을 강조합니다. 정말 살아있는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 참 믿음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참 믿음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정말 구원받았다면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야고보서에서도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속에 산 믿음이 없는 까닭에 행함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으므로 나의 생활에서 신앙적인 행동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생명 있는 산 믿음을 가져서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구원 받은 성도는 말씀을 순종하여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대전 탄방교회 박석중 목사

야고보서 2:14-26 행함이 있는 믿음

야고보서 2:14-26 <행함이 있는 믿음>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어떤 사람에 대해서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들은 말들은 선입관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오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겪어보고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겪어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를 하지 못하면 오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해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도 ‘행함’의 의미를 오해하여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 이라 불렀습니다.

야고보 2장의 주제는 <믿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다루었던 2장의 전반부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하자고 합니다.

오늘 다루는 후반부에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촉구합니다.

본문에 ‘ 믿음’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옵니까? 11번, ‘믿는다’는 동사가 3번 나옵니다.

‘행함’이라는 단어가 12번 나옵니다.

요약하면 ‘믿음’과 ‘행함’이 본문의 핵심단어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야고보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 다른 말로 하면 유익이 없는 믿음이요(16절), 죽은 믿음이요(17절), 귀신 수준의 믿음이요(19절), 헛된 믿음이라(20절)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가진 믿음은 과연 참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일에 내가 가진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 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내가 가진 믿음이 과연 참 믿음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엇을 통해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행함이 있는 믿음, 행함을 통해 증거되는 믿음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1.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받은 구원을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우리는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 뉘앙스가 다르다는 측면, 강조점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8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오늘 본문 2: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하면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의 가르침과 ‘행함’를 강조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이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ex)*모순(矛盾)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과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이라는 용어를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믿음’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거짓 선생들의 영향을 받은 일부 교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을 지키거나 할례를 행함으로 구원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그럴 때 바울은 그런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인정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19절에 보면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입니다.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가르침은 강조하는 바가 다를 뿐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것이고 그의 대답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반면에, 야고보의 논지는 ‘참된 구원을 얻는 믿음을 소유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것이고 그 대답은 ‘그의 열매를 보아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아고보는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구원받은 믿음이 증거되는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주어지며 참 믿음은 행위로 확인됩니다.

분명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증거되느냐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내가 믿었다! 내가 믿는다! 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믿음이 증거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말 구원의 믿음이 있다면 그는 믿음의 행위가 반드시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열매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믿음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은 기간도 오래되고 행동도 점잖고 신앙적인 지식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하여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보겠다는 열정이 전혀 없습니다.

다른 영혼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습니다.

마치 사랑이 식어버린 부부 사이와 같습니다. 이럴 때 이 사람의 믿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음의 행동을 동반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 은혜는 반드시 밖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고후 4:15, <은혜가 많은 사람이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쓰임 받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셔서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들의 어두운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쪼이기 원하셨습니다.

바울의 고난과 수고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은 사람들에 넘쳐흘러 그들도 구원받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함입니다.

받은 은혜를 품고만 있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말만 앞세워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서로 보완관계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은 행위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행위로만 구원받을 수 없지만 믿음을 가진 자는 행동으로 그 믿음을 증거합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고, 자신의 직분을 말한다고 그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그의 삶을 통해 그 믿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구원에 합당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17절<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만약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요,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믿음이란 형식적인 믿음, 가식적인 믿음,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인 믿음, 이런 믿음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그 예를 들고 있습니다.

15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떤 형제가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곁에서 불쌍하다, 입을 것이 있어야겠네, 먹을 것이 있어야겠네 말만 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형제들을 돕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 사람을 도와야 하는 부담이 자기에게 돌아올까 봐 몸을 사립니다.

이런 믿음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듣게 되는 말 <예수쟁이들을 말만 해! 말만 많아!>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 치명적인 말입니다.

행동이 없이 말만 번지르르하거나, 애쓰고 땀 흘리며 수고하는 헌신을 뒤로 하고,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은 헛것이다! 죽은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습니다.

26절<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안타깝지만 뇌사 상태에 있는 사람, 숨만 붙어 있는 사람을 과연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죽은 믿음은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영혼 하나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다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할 수는 있습니다.

마음속에 선한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되면 바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두 번 생각하면 인색한 마음이 생겨서 행동을 주저하게 되어 결국 은혜의 통로를 막습니다.

야고보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지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ex) 어느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되어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주일 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위해서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하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 명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 것이면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분 후,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 사람을 신장기증자로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에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답니다.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도, 뜨거운 눈물로 기도하며, 아름다운 말들을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단 한 절의 말씀일지라도, 단 한번의 감동일지라도 순종하며 따르며 행동할 때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한 주간도 살아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말로만 불쌍하다, 안됐다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22절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는 본절에서 ‘의롭다 함’의 근거가 오직 행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오직 행함만이 아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리의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올바른 행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의일 뿐입니다.

결국, 참 믿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이 따르게 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도 행함을 통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별로 없는데 희생적이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줍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신앙이 있다고 하는데 너무 인색해서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여 나은 점이 별로 없을 때 사람들은 ‘과연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을 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도 오래 다니고 교회에서 직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삶에 선한 증거가 별로 없고, 섬길 줄도 모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해 어떤 사람이 말을 겁니다.

“당신은 오래 믿어서 교회 안에서는 신앙이 좋은 것처럼 행세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나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있다는 사람이 이웃을 위하여 하는 것이 무어냐는 겁니다.

나는 믿음은 별로 없지만 이웃을 섬긴다는 겁니다.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하면서 다른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지식은 귀신들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행함이 없이 지식만을 내세우는 신앙은 귀신이 가진 정도의 신앙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복음서를 보면 귀신들린 자들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야고보는 구체적인 실천이 없는 신앙은 거의 귀신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삶의 열매가 도무지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적용되어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고 감동을 줄 때 비로소 그 사람이 말씀을 들은 것이고 믿음이 생긴 것이지 그가 단순히 설교를 들었거나 설교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하여 그가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몇 마디라도 들은 말씀을 통하여 태도의 변화를 일으키고 삶이 바뀌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꾸게 하고 삶의 양식과 습관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어도 좀처럼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렇게 설교하는 목사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 할거야. 장로님도 그렇게 살지 못 하는데 나 같은 평신도가 어떻게 말씀대로 살겠어?” 하며 자기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거나 타협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날카롭지만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 없는 자보다 더 양심이 굳어져서 나중에는 어떤 것으로도 그 마음을 회개시킬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참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한 사람은 남자요 다른 사람은 여자입니다.

한 사람은 존경 받는 족장이요 다른 사람은 손가락질 받는 기생입니다.

한 사람은 선택 받은 히브리인이요, 다른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 출신인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믿음생활 하면서 삶의 변화가 나타나고 행함의 열매가 있으면 됩니다.

믿음은 볼 수 없지만 그 열매로 그 믿음을 압니다.

아브라함이나 라합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행위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계심만을 믿거나 그분의 말씀만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려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며 예배하고 이 세상에서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족속과 요단 동쪽의 왕들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섬멸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들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라합의 믿음은 듣고 아는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여리고에 온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는 목숨을 건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과 그 가정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라합은 그의 신앙고백을 삶 속에 실천했으며, 이러한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직업이 기생이었기에 많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속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소극적인 믿음이 아니라 용기와 결단으로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살린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결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후에 라합은 롯의 시아버지인 살몬의 아내가 되고,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어 다윗 왕조를 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게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라합은 행위로서 믿음을 온전케 하였습니다.

이렇듯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될 때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믿으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눅 14:26-27, 33).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포기는 구체적인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믿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나의 것을 실제로 포기하거나 버릴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멸망과 구원을 함께 의논할 수 있는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영생을 얻는 길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다가 끝나버리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거할 사명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는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 믿음은 행위로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 행위에서 우리의 믿음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표현되고 증거되고 나타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알고만 있고, 실천되어지지 않는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실천되어지는 믿음, 삶으로 증거되는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1)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는 그 삶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2)반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확신을 해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합니다.

3)행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온전케 됩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성화되게 합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약2:14-26) > 설교자료실

믿음으로 삽시다.본문 : 야고보서 2장 14 – 26절 마경훈 목사본문 : 야고보서 2장 14 – 26절(개역개정)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오늘 설교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거울이 되기를 원합니다.어느 날 한 젊은 여자가 어린 딸을 데리고 길가 모퉁이에서 돈이든, 음식이든 무엇이든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구걸하며 초라하게 서 있었습니다. 엄마뿐 아니라 딸도 아주 형편없는 옷차림이었습니다. 수치심이 일 정도로 더럽고 지저분했습니다. 잘 차려입은 한 중년 신사가 모퉁이를 지나가면서도 불쌍한 소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사가 자신의 좋은 집, 행복하고 편안한 가정으로 돌아와 잘 차려진 저녁을 먹었을 때 문득 모퉁이에 서 있던 그 젊은 여자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이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하나님에 대해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항의에 찬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도록 방치해 둘 수 있습니까? 왜 이 여자와 딸을 도울 수 있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었습니다. “난 분명히 조취를 취했다. 너를 세상에 보냈지 않았느냐?”우리는 하나님께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를 통해 돕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부족함에 대해서 불평하지만 하나님은 불평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그 부족함을 채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것을 찾아내고 부족한 것을 발견하는 눈을 갖는 것보다 나 자신이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한국교회의 문제 점 중에 하나는 신앙과 생활이 이분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한국교회 신자들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장훈태 목사님이 성경책을 잃어버려서 서울역에 있는 서점에 가서 성경책 사려고 했는데 원하는 스타일의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다른 스타일의 성경책은 없는지 물었더니 주인의 답변이 기가 막힌 말이었습니다. 현재 서점에 남은 성경이 두 권인데 하도 훔쳐가는 사람이 많아서 더 이상 갖다놓지 않을 것이랍니다. 성경을 많이 잃어버린 서점 주인은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할까요?도시의 복개천 지하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서 경찰이 들어가 봤더니 도둑놈들이 복개천 지하에 있는 철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잡아다가 조사를 했더니 한 달이 넘도록 철근을 빼갔는데 주일과 수요일은 훔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주일과 수요일은 훔치지 않았을까요? 교회 가서 예배드리느라고 주일과 수요일은 쉬었다는 것입니다. 성수주일 하느라고 도적질도 쉬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일과 수요일이 없었다면 1주일에 7일 동안 계속해서 도적질을 했을 텐데 주일을 지키고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도적질을 1주일에 5일 밖에 못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그런 종류의 사건이 아닙니다.물론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 그리스도인이 1천만 명이나 되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도 나올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기를 원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 믿음을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18절에 보면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함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아마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줄타기 선수 불론딘(Blondine)의 이야기입니다. 블론딘이 나이아가라폭포 위에 줄을 매고 줄을 타게 되었습니다. 미국 쪽에서 캐나다 쪽으로 먼저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는 줄을 타기 전에 운집한 군중에게 확성기를 통해서 소리쳤습니다. “제가 이 장대 하나만 들고 이 쪽에서 저 캐나다 쪽으로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때 많은 관중은 입을 모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정말 나이아가라폭포 위에 맨 줄을 막대 하나만 들고 건넜습니다. 사람들은 손을 쥐고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면서 지켜보다가 블론딘이 성공하자 우레 같은 박수로 환호했습니다. 이번에는 캐나다 쪽에서 미국 쪽으로 건너가려 하면서 또 물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조그만 손수레가 있습니다. 이 수레를 제 몸에 걸고 건너려고 하는데 성공하라 믿습니까?” 관중들은 “믿고 말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블론딘은 그의 몸에 수레를 걸고 장대를 들고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데 성공했습니다. 관중들은 흥분해서 수건을 던지고 모자를 벗어 던지며 환호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엄청난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으로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줄을 타고 건너는 일에 성공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제 등 뒤의 손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건너가려 합니다. 성공하리라 습니까?” 그랬더니 두 번씩이나 성공한 그가 이번에도 성공할 것을 믿고 모든 관중은 박수를 치면서 “네, 믿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블론딘이 관중 속에 용감해 보이는 한 청년에게 가서 “자, 타십시오” 했더니, 그 청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니오, 아니” 하면서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믿는다고 말한다고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청년이 정말로 블론디가 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나아아가라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었다면 수레 위에 올라탔을 것입니다.21, 22절을 보면 야고보 장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행함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행함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이 온전하려면 양면이 온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면만 있다면 온전한 동전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이 온전한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이 온전한 행함이 없습니다. 행함이 있을 때 믿음이 온전하고 믿음이 있을 때 행함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하는 것이고, 바울 사도는 롬 14:23에서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기 신앙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 7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거짓 믿음을 자진 자들이 심판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마도 그들은 세상에 있을 때에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 앞에 서서 주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밝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한 비유를 통해서 행함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건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이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할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과거에 어느 집사님은 늘 끝까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 제목을 내놓고는 했습니다. 믿음은 지금도 중요하지만 나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잘 믿는 것 같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그럼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1.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믿음이 확실하면 행함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손바닥과 손등처럼 하나가 가면 다른 하나도 가고 하나가 멈추면 다른 하나도 멈추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행함을 보여주는데 그들의 놀라운 행함은 놀라운 믿음에서 온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것과 여리고를 무너뜨린 사건은 행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단을 건너기 위해서는 넘치는 요단강을 밟아야 했습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견고한 여리고 성을 13바퀴 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강을 밟고 여리고를 돈 것은 믿음이 충만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믿음이 없었다면 행함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요단강 물이 넘치는 시기에 요단강물을 밟는 것은 생명을 거는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가르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 40년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다양한 방법으로 체험했고 그 결과 요단강을 밟을 수 있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요단강을 밟는 행함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여리고를 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견고한 성 여리고를 13바퀴 돌아서 무너진다는 것은 인간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그렇다면 어떻게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확실한 믿음이 생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롬 10:17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가쳐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들은 성경을 읽어야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Your child’s brain 당신 아이들의 두뇌” 라는 글이 있습니다. 샤론 베글리(Sharon Begley)라는 분이 아이들의 뇌가 어떻게 발달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쓴 글입니다. 이 글에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일이고, 듣는 일이랍니다. 그 내용을 잠깐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같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나누어지는데, 인간의 하드웨어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본능적인 기능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심장을 박동 시킨다든지, 먹으면 소화를 시켜서 밖으로 내 놓는다든지, 위험이 오면 본능적으로 피한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머리 속에 입력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소프트웨어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빈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 두뇌의 용량은 무려 100조에 이르는 신경원(neurons)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곳에 어떠한 것을 입력시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과 삶, 일생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논리적인 두뇌는 태어나면서부터 네 살까지 형성되는데 그 이전에 논리적인 분야를 가르쳐주면 그쪽 분야의 신경세포에 신경회로(muscle) 같은 것이 생기게 되고요, 음악적인 뇌는 세 살부터 열 살까지 형성되는데 그 때에 음악을 계속해서 들려주면 음악분야의 신경세포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음식 맛은 세 살 이전에 형성되는데 그 이전에 어떠한 것을 자주 먹이느냐에 따라서 음식 쪽의 신경세포가 형성이 되어서 나이를 먹어도 세 살 이전의 맛을 떠나지 못하고, 언어는 태어나면서 열 살까지 형성되는데, 열 살 이전에 언어를 가르쳐주면 언어분야의 신경근육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이중 언어를 익혀주려면 적어도 열 살이 되기 전까지는 가르쳐주어야 원어에 가장 가까운 발음을 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기타를 계속 치면서 노래를 불러 주면서 키우면 그 아이가 자라서 기타를 배우게 될 때에 본능적으로 코드를 잡는다는 겁니다. 어릴 때에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이미 기타에 대한 신경세포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서 교회에 나온 아이들은 자라면 음악을 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악가의 집안에서는 음악가가 나오기 쉽고, 의사 집안에서는 의사가 나오기 쉽고, 운동 잘하는 집안에서는 운동선수가 나오기 쉽고, 목사 집안에서는 목사가 나오기 쉬운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시작을 어떠한 것을 입력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결정된다는 것은 인간의 두뇌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해당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입력되지 않은 100조의 인간의 두뇌처럼, 아무 것도 입력되지 않은 신앙생활에다가 처음에 어떠한 것을 입력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믿음 생활이 달라지고,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믿음생활을 보다 더 잘 하기 위하여 어떠한 것으로 채워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분들은 성경을 많이 읽으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더욱 성장할 것입니다.컵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에 의해서 컵에서 나오는 것이 결정되고, 컵의 색깔이 결정되는 것처럼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할 때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고 말씀대로 충만할 때 말씀의 색깔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2. 성령으로 충만하라.성령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고 능력을 주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이루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요 16:13에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뜻과 진리를 행하게 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보면 말씀을 많이 알지만 행함은 없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영문법은 많이 알고 있는데 회화가 안 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러시아의 어떤 사람이 영문법 책 6권을 출판했습니다. 책의 구성과 내용이 너무나 훌륭해서 영문학 박사들도 놀랄 정도로 좋은 책입니다. 그 책을 본 미국의 한 대학의 교수가 책의 저자를 만나고 싶어서 러시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저자와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의 저자는 문법은 기가 막히게 잘 정리했는데 회화는 한 마디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성경 지식은 풍부한데 성경적인 생활은 전무한 나이롱 신자가 없기를 바랍니다.성경을 많이 아는데 성경대로 살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살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마치 엔진은 좋은데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 같습니다.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조건은 갖췄지만 기름이 없어서 능력을 행할 수 없는 자동차처럼, 말씀이 있어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말씀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겔 36:27에 보면 에스겔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여기서 ‘내 영’은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시고 그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살 때 말씀대로 살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3.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생활을 하라.말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의 생각과 신체의 기관들과 행동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큰 배가 지극히 작은 키 하나에 의해서 사공의 뜻대로 움직여지는 것처럼 혀도 작은 지체이지만 온 몸을 조정한다고 말씀합니다.롬 10:8에 보면 바울이 전파한 말씀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말씀은 믿음의 사람의 마음에 있고 입에도 있는 말씀입니다. 즉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는 시인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버울은 디모데에게 신자들은 이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며(딤전 4:6), 롬 10:10에서는 이 믿음의 말씀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 30:14에서는 이 믿음의 말씀을 가질 때, 즉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말씀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저는 다윗의 인생은 신앙고백으로 승리한 인생이라고 봅니다. 다윗은 많은 시편을 기록했는데 그의 시를 보면 그는 환경이 좋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고백을 했을 뿐만 아니라 환경이 어려울 때에도 확실한 신앙의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며 방패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능력이십니다. 나의 반석이십니다.” 다윗의 이런 고백들은 그가 위경에 처할 때 이겨낼 능력을 주었으며 그를 더 확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나갔던 것입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바다가 잔잔해서 배가 흔들림이 없을 때에도 그 배 안에 있어야 하고 큰 파도가 일어서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그 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고 선포해야 합니다.4. 말씀대로 사는 것을 훈련 하라.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일방적으로 주어지지만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자신의 경건생활을 훈련했고,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고 했는데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에서는 “경건함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 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적이 존재합니다. 사단도 적이고 유혹하는 세상도 적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물리쳐야 할 적입니다. 어찌 보면 신앙생활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 자기만을 주장하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행복한 가정이 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기를 부인해야 행복한 것입니다.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김득구라는 권투 선수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세계챔피언에 도전했다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김득구 선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2002년에 “챔피언”이란 제목으로 상영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4세에 강원도 바닷가 마을 거진에서 무작정 상경한 김득구는 당시 권투를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꾸던 꿈을 꿉니다. 맨주먹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어서 부와 명예를 얻겠다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 성공, 즉 “챔피언”의 개념을 의미 있게 선정합니다. 체육관에 입관하려는 득구와 몇 젊은이들에게 김현치 관장이 말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똥지게를 져도 그 분야에서 최고면 그 사람이 바로 챔피언이다” 김득구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 없어서 방황할 때 관장은 거울 앞에 득구를 세워놓고 말합니다. “권투선수는 미스 코리아보다 더 거울을 많이 본다. 그 이유는 싸워야 할 상대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승리다. 최선을 다하는 게 승리이고 그렇게 하는 자가 바로 챔피언이다” 정말 의미 있는 말입니다.모든 것이 그렇듯 신앙생활도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훈련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반복적인 훈련이 되면 실전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 저희 부대에서는 공수부대에 가서 약4주 정도 훈련을 받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키가 좀 작어서 열외 되었지만 말입니다. 훈련을 받고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3주간은 훈련을 받고 마지막 4주째에 낙하산을 탄다고 들었습니다. 낙하산을 타기 전에 막타워를 탑니다. 용어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3주간 훈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착지하는 자세연습이라고 합니다. 수천 번 수만 번 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 오른 후에 낙하산을 타고 땅에 떨어지면 그동안 연습했던 자세가 그대로 나와서 안전하게 착지한다고 합니다.신앙생활도 훈련해야 합니다. 대인관계도 훈련합시다. 상대를 보고 웃는 훈련도 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해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하는 훈련도 하시고, 예배를 철저하게 드리는 훈련, 엎드려 기도하는 훈련, 복음을 전하는 훈련 등 자신을 훈련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훈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십시오. 자신이 자신을 훈련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훈련하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훈련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훈련이라고 생각하시고 기쁘게 받으십시오. 훈련 후에 주어지는 큰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2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야고보서 2:14-26 KRV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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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4-26절 행함, 하나님께 드려지는 흠 없는 산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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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4-26절 행함, 하나님께 드려지는 흠 없는 산 제물

2:14-26은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해 다룹니다. 믿음은 지적인 이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거짓된 것입니다. 믿음은 삶을 통해 믿는 바를 드러내야 합니다. 14-17절에서는 굶주린 형제에게 말로만 배부르라고 하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17절)이며, 그것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18-26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통해 믿음은 결국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장을 마무리하면서 26절에서 ‘영혼’을 ‘행함’과 비유하면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도 죽은 것으로 정의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행함은 몸의 영혼과 같은 것입니다.

14-17 죽은 믿음

18-19 귀신의 믿음

20-25 아브라함과 라합 행함

26 결론: 행함 없는 믿음

2. 강해

14-17 죽은 믿음

14절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할 수 없다고 야고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 없이 믿음만 가지고 그것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행일치의 사람은 성인이라 존경 받습니다. 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고, 참 사람입니다. 믿음도 동일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성도이고, 그가 참 사람입니다. 행함에 대한 논쟁은 묵은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정의할 때 앎과 행함은 언제나 동반 자였거나 적대적이었습니다. 완전한 균형을 이룬 적은 거의 없었던 같습니다. 심지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야고보서에도 행함 없는 믿음으로 인해 교회 안에 심각한 갈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채영삼 교수는 <공동 신학의 서신>에서 믿음과 행함은 대치가 아니라 ‘성취’의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을 조언합니다. 즉 행함은 믿음을 ‘온전’(1:4)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감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고 자라나 감이 열리듯, 행함은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밖으로 드러나야 할 마땅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는 것입니다. 아뇨. 절대 구원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굶주린 형제에게 말로만 ‘배부르라’ ‘따뜻하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며,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행함은 사랑의 실천이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만약 내 자신이 굶주리고 헐벗었다면 말로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먹을 것을 찾을 것이고 입을 것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의 기초는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내 목숨, 내 뜻, 내 정성, 내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이 아닙니다. ‘내 것’입니다. 이웃 사랑 역시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가르치지 않아도 사랑합니다. 긍휼의 뜻이 타인의 아픔으로 내 아픔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18-19 귀신의 믿음

귀신의 믿음을 보십시오. 귀신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군대 귀신들인 사람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알고도 동네에서 쫓아냈습니다. 야고보는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고 말합니다.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하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알지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된 것입니다.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신학적 깊이가 있다해도, 천사의 말과 같은 달변을 늘어놓는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주일날 11시부터가 아니라 주일 저녁 집으로 돌아간 때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 할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을 통해 ‘온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안에서 계속하여 ‘온전하다’(텔레이오스)를 발견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믿음뿐 아니라 행함을 통해서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의로움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믿음은 행함과 분리할 수 없는 일체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믿음이 씨앗이라면 행함은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과정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지으시고 코 안에 ‘생기’(바람)을 불어넣으심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이처럼 행함은 믿음에 생기는 넣는 것과 같고, 믿음을 믿음으로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온전하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20-25 아브라함과 라합 행함

기생 라합의 순종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더욱 확장시킵니다. 라합은 가나안이 멸망 받음을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수 2:9-11) 라합뿐 아니라 모든 가나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라합만이 앎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멸할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생각해 달라고 청을 합니다. 라합은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겼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도 하나님으로부터 홍수 심판의 계시를 듣고 방주를 짓는데 자신의 모든 시간과 재물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야고보서를 마태복음과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독 ‘열매’를 강조하고, 그 열매는 ‘사랑의 헌신’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와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행한 설교들은 모두 열매 없는 이스라엘이 심판받게 될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전통은 있으나 생명이 사라진 이스라엘의 종교를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흠 있는 제물’이며, ‘부정한 존재’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없는 행함은 교만이며,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보이고, 행함은 믿음 안에 있을 때 진정한 믿음이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행함이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흠 없는 제물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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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4-19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장 14-19절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는 거짓 믿음과 참된 믿음을 구별하기 원합니다. 무조건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극단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탄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고 떤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들보다 뛰어나게 알고 있고, 심지어 두려워하지만 믿음과 정반대의 결과물을 토해냅니다.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이유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거짓 믿음은 생명이 없는 믿음입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선한 행동의 결과물(성령의 열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생명이 없는 거짓 믿음의 모습을 행함이 없는 공허한 말장난이라고 지적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형제들에게 경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함을 받습니다. 행위는 분명히 은혜의 근거가 아닙니다. 하지만 행위는 은혜와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선한 행동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우리는 듣기만 하고, 말로만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동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야고보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은혜로부터 나오는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의 연약함과 불순종한 모습을 볼 때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행동입니다. 머리로 알고 말로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 있는 순종의 첫걸음을 시작해야 합니다. 생명력 있는 순종은 씨를 뿌려 싹이 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순종의 기쁨을 행함으로 누려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불신자와 같은 삶을 거부하여 참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함의 기쁨을 일상의 삶 속에서 풍성히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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